화려한 그래픽의 시대, 홀연히 등장한 미니멀리즘
1990년대 후반 도쿄 하라주쿠 골목길은 그야말로 원색의 그래픽 티셔츠와 큼직한 로고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에이프(A Bathing Ape)나 언더커버(UNDERCOVER) 같은 브랜드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스트리트 웨어의 황금기를 이끌고 있었죠. 그런데 1998년, 이 시끌벅적한 골목 한편에서 정반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기요나가 히로후미(Hirofumi Kiyonaga)였습니다.
기요나가는 브랜드를 만들기 전, 프랑스 브랜드 A.P.C.의 도쿄 디스트리뷰터에서 일하며 스토어 매니저로 경력을 쌓았습니다. A.P.C.의 수장 장 투이투(Jean Touitou) 밑에서 일하며 그가 배운 건 분명했습니다. 겉보기만 화려한 유행을 쫓기보다는 매일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옷 본연의 기본기와 정갈함이 더 오래간다는 사실이었죠.
기요나가는 당시 20대 후반에서 30대로 접어들던 스트리트 1세대 친구들을 눈여겨보았습니다. 화려한 그래픽 티셔츠를 입고 밤거리를 누비던 이들도 나이를 먹고 직장을 다니며 조금 더 단정하고 성숙한 옷을 찾기 시작했거든요. 그렇게 1998년 탄생한 브랜드가 바로 ‘소프(SOPH., 2002년 SOPHNET.으로 개명)’였습니다.

일상복에 기능성 아웃도어를 녹여내다
소프넷이 던진 출사표는 명확했습니다. ‘어른들을 위한 정갈하고 세련된 일상복’이었죠. 군더더기 없는 미니멀한 실루엣에 기요나가는 아주 영리한 요소를 결합했습니다. 바로 고어텍스(GORE-TEX)나 쿨맥스(COOLMAX) 같은 아웃도어·스포츠 테크니컬 기능성 원단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셔츠나 슬랙스에 방수, 통기성 소재를 쓰는 게 흔한 일이지만, 90년대 말에는 대단히 신선한 시도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깔끔한 치노 팬츠나 집업 재킷인데, 비가 오는 날에도 쾌적하게 입을 수 있고 통풍이 잘되는 옷이었으니까요. 거리의 자유분방한 감성을 간직한 채 사회생활을 시작한 젊은 직장인들에게 소프넷은 더할 나위 없는 대안이 되었습니다.
| 구분 | 90년대 후반 우라하라 스트리트웨어 | 초기 SOPH. (소프넷) |
|---|---|---|
| 디자인 콘셉트 | 대형 그래픽, 눈에 띄는 로고 플레이 | 미니멀리즘, 절제된 디테일 |
| 주요 소재 | 전통적인 면(Cotton), 헤비웨이트 스웨트 | 고어텍스, 쿨맥스 등 기능성 테크 원단 |
| 지향점 | 하위문화 기반의 유스 컬처 | 어른들을 위한 성숙한 데일리 웨어 |
가상의 축구팀 ‘F.C. Real Bristol’의 탄생
브랜드가 자리를 잡아가던 1999년, 소문난 축구광이었던 기요나가는 머릿속에 품고 있던 기발한 장난을 현실로 옮기기로 합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가 다가오면서 일본 전역에 축구 열기가 서서히 고조되던 시기였습니다. 기요나가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직접 프로 축구 구단을 운영할 수는 없지만, 가상의 축구팀을 만들고 그 팀의 유니폼과 선수단 일상복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렇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가상 축구 클럽, ‘F.C. Real Bristol(이하 F.C.R.B.)’이 탄생했습니다. 클럽 엠블럼을 만들고, 팀의 트레이닝복과 웜업 재킷, 서포터즈를 위한 티셔츠를 정식 컬렉션으로 디자인해 발표했죠. 축구 경기장에서 입는 옷을 스트리트 패션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온, 오늘날 유행하는 ‘블록코어(Blokecore)’의 진정한 조상 격 기획이었습니다.

스포츠 공룡 나이키의 기막힌 스폰서십
F.C.R.B.의 프로젝트가 패션계의 이목을 끈 결정적인 계기는 2000년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Nike)의 등장이었습니다. 나이키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이 가상의 축구 클럽과 공식 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한 것입니다.
나이키는 F.C.R.B.의 정식 유니폼과 트레이닝 웨어에 자사의 기술력(Dri-FIT 등)과 공식 스우시(Swoosh) 로고를 넣어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르셀로나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같은 세계 최고의 명문 구단을 후원하던 나이키가 도쿄의 작은 패션 브랜드가 만든 가상 팀의 가슴팍에 스우시를 달아준 것이죠. 이는 스포츠 비즈니스와 스트리트 패션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전무후무한 발상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건 룩북 연출이었습니다. 가상의 팀이다 보니 계약된 실제 선수가 없었죠. 기요나가는 사람 모델 대신 정교하게 제작된 축구선수 마네킹(더미)을 세워두고 룩북을 촬영했습니다. 무표정한 마네킹이 나이키 스우시가 새겨진 트레이닝복을 입고 잔디밭에 서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F.C.R.B.만의 독특한 서브컬처 유머를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기요나가의 유산
기요나가 히로후미가 SOPH.와 F.C.R.B.를 통해 보여준 건 단순히 예쁜 옷이 아니었습니다. ‘패션이란 옷을 파는 것을 넘어, 즐거운 세계관과 가상의 문화를 함께 공유하는 놀이’라는 점을 일찌감치 증명한 셈이었죠.
이후 그는 후지와라 히로시와 함께 유니폼 익스페리먼트(uniform experiment)를 전개하고, 일본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숍 문화를 이끌며 도쿄 패션의 한 축을 든든하게 지켰습니다. 2022년 기요나가는 SOPH.의 디렉터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났지만, 그가 20여 년 전 던진 유쾌한 상상은 여전히 전 세계 패션 애호가들의 옷장 속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참고 문헌 및 아카이브 출처
- W. David Marx, 『Ametora: How Japan Saved American Style』, Basic Books, 2015.
- Hypebeast, “‘Breaking Bread’ with SOPH.’s Hirofumi Kiyonaga”, Hypebeast Video Interview, 2020.
- Sabukaru Online, “When SOPHNET and Nike created the world’s first fictional Football team: FCRB”, Fashion Archive, 2022.
- SoccerBible, “The History of F.C. Real Bristol: Football Culture Meets Streetwear”, Culture Feature, 2015.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