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컬처가 럭셔리의 문을 열기까지
패션계를 뒤흔들었던 버질 아블로(Virgil Abloh)를 기억하시나요? 건축과 토목공학을 전공한 그가 럭셔리 하우스 루이비통(Louis Vuitton)의 남성복 아티스틱 디렉터 자리에 올랐을 때, 많은 이들이 패션계의 문법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버질 아블로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패션 교육은 파리의 화려한 패션 스쿨이 아닌, 1990년대 도쿄의 뒷골목 ‘우라하라(裏原宿)’에서 이루어졌다고 고백하곤 했습니다. 챔피온 티셔츠에 숫자를 찍어내던 인디 브랜드 ‘파이렉스 비전(Pyrex Vision)’부터 세계 최고의 패션 하우스 루이비통에 이르기까지, 그의 디자인 철학 밑바탕에는 늘 도쿄 스트리트웨어의 유산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우라하라의 작은 티셔츠 가게에서 시작된 실험이 어떻게 30년 뒤 파리 퐁뇌프 다리와 럭셔리 런웨이를 정복하게 되었을까요? 그 흥미진진한 궤적을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우라하라, 버질 아블로의 위대한 학교
1990년대 초 도쿄 하라주쿠의 비좁은 주택가 골목길, 일명 ‘우라하라’에서는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후지와라 히로시(Hiroshi Fujiwara)의 지휘 아래, 니고(NIGO)와 다카하시 준(Jun Takahashi) 같은 젊은이들이 모여 작은 상점 ‘노웨어(NOWHERE)’를 열고 자신들만의 그래픽 티셔츠를 소량 인쇄해 팔기 시작했죠.
미국 시카고 외곽 록퍼드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힙합을 듣던 10대의 버질 아블로는 지구 반대편 도쿄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새로운 공기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일본 잡지를 어렵게 구해 보며 베이프(A Bathing Ape), 언더커버(Undercover), 굿이너프(Goodenough)의 행보를 집요하게 추적했습니다.
버질은 훗날 니고를 가리켜 “내 패션 인생에서 만난 최초의 진정한 멘토”라고 불렀습니다. 정통 꾸뛰르 학교의 가르침 대신, 빈티지 미학을 해체하고 재조합하던 우라하라의 서브컬처가 버질 아블로에게는 최고의 종합대학이었던 셈입니다.
| 인물 | 우라하라 씬에서의 역할 | 버질 아블로에게 미친 영향 |
|---|---|---|
| 후지와라 히로시 | 굿이너프 설립, 우라하라의 대부 | 서브컬처와 하이엔드를 잇는 협업의 문법 전수 |
| 니고 (NIGO) | A Bathing Ape 설립 | 그래픽 아카이브 구축, 브랜딩 및 멘토십 제공 |
| 다카하시 준 | 언더커버 설립 | 펑크 록과 그런지 스트리트웨어의 실험적 결합 |

사진: Basile Morin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파이렉스 비전과 오프화이트에 깃든 도쿄의 그래픽 미학
버질 아블로가 2012년 세상에 처음 이름을 알린 프로젝트 ‘파이렉스 비전(Pyrex Vision)’을 떠올려 볼까요? 그는 랄프 로렌의 럭비(Rugby) 라인 데드스톡 플란넬 셔츠와 챔피온(Champion) 반바지를 사들여, 등판에 굵직한 폰트로 ‘PYREX’와 마이클 조던의 등번호 ’23’, 그리고 카라바조의 명화를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냈습니다.
기성품을 가져와 약간의 그래픽만 덧입혀 몇 배의 가격에 판매하는 이 방식은 당시 패션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전혀 새로운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90년대 초반 노웨어(NOWHERE) 시절, 니고와 준이 헤인즈나 챔피온 무지 티셔츠에 손수 실크스크린 잉크를 밀어 넣으며 그래픽 티셔츠 문화를 탄생시켰던 우라하라의 DIY 인쇄 방식과 정확히 닮아 있었습니다.
버질 아블로가 정립한 유명한 명제, “기존의 형태에서 단 3%만 바꾸면 완전히 새로운 창작물이 된다”는 ‘3% 접근법(3 Percent Approach)’ 역시 우라하라 크리에이터들이 50년대 빈티지 아메카지 의류를 샘플링하고 비틀던 방식의 연장선이었습니다. 이후 그가 론칭한 오프화이트(Off-White)의 시그니처인 사선 스트라이프(Diagonals)와 따옴표 그래픽 역시 도쿄 언더그라운드 특유의 날것 그대로의 인쇄 미학을 현대적으로 정제해 낸 결과물이었습니다.
“스트리트웨어는 단순한 옷이 아닙니다. 일종의 공동체이자, 기존 시스템에 질문을 던지는 아이디어들의 집합체입니다.”
— 버질 아블로
퐁뇌프 다리에서 만난 두 사람: 루이비통과 LV² 컬렉션
2018년, 버질 아블로가 루이비통 남성복 총괄 디렉터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홀로 영광을 독차지하지 않았습니다. 취임 후 그가 성사시킨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는 바로 자신의 오랜 멘토인 니고를 루이비통으로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2020년과 2021년 두 차례에 걸쳐 공개된 ‘LV² (Louis Vuitton Squared)’ 캡슐 컬렉션은 패션사에 매우 상징적인 장면을 남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럭셔리 하우스와 스트리트웨어 거장의 만남이라기에 흔한 후디나 로고 티셔츠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습니다.
- 정교한 테일러링: 1950~60년대 영국 런던 새빌 로(Savile Row)의 모즈 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수트
- 장인정신의 데님: 일본 장인들이 직조한 셀비지 데님에 루이비통의 다미에(Damier) 체크와 모노그램을 패치워크한 재킷
- 동양적 위트: 니고의 브랜드 휴먼메이드(Human Made)를 연상시키는 만화적인 오리와 거북이 그래픽 자수
두 사람은 스트리트웨어가 단순한 길거리 옷이 아니라, 하이엔드 테일러링과 일본의 워크웨어 장인정신까지 아우를 수 있는 거대한 문화적 그릇임을 루이비통의 아카이브를 통해 당당히 증명해 보였습니다.

사진: Myles Kalus Anak Jihem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길거리에서 럭셔리의 왕좌까지: 30년이 남긴 것
1993년 도쿄 우라하라의 작은 상점에서 시작된 티셔츠 한 장의 꿈은 버질 아블로라는 매개체를 거쳐 2020년대 파리 럭셔리의 심장부로 이어졌습니다. 서브컬처를 즐기던 소년들이 마침내 전통 하우스의 왕좌에 앉아 패션의 규칙을 다시 쓴 것입니다.
버질 아블로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도쿄에서 흡수하고 파리에서 만개시킨 유산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니고는 현재 LVMH 산하의 역사 깊은 프랑스 브랜드 겐조(Kenzo)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활약하고 있으며, 루이비통의 바통은 버질과 니고의 오랜 친구인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에게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입는 고급스러운 그래픽 티셔츠와 스니커즈, 그리고 테일러링과 스트리트웨어의 조화는 우라하라의 골목길에서 싹터 버질 아블로의 손끝에서 완성된 30년간의 문화적 결실인 것입니다.

사진: Rodney / CC BY 2.0 / Wikimedia Commons
참고 문헌 및 아카이브 출처
- Marks, W. David. 『Ametora: How Japan Saved American Style』, Basic Books, 2015.
- Abloh, Virgil. 『Figures of Speech』, DelMonico Books · Prestel, 2019.
- Vogue Runway, 「Louis Vuitton LV² Pre-Fall 2020 Collection Review & Virgil Abloh Interview」, 2020.
- Highsnobiety, 「Visiting Virgil Abloh and NIGO in Their Tailoring Time Machine」, 2021.
- Sotheby’s, 「Virgil Abloh on the Cultural Significance of Nigo」 Official Archive,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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